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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 태안 볏가리 마을
안명송림전경

안면도 소나무는 대부분 붉은 빛깔을 띠는 홍송인데 이러한 홍송은 그 색이 곱우며 화려함은 물론 단아함까지 갖추고 있다. / 이곳에는 아름드리 거목은 없지만 대신위로 잘뻗은 소나무들이 많이 존재한다. 안면도 소나무는 지역 이름을 따서 안면송으로 불린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명이 이름이 된 경우다. 경복궁을 지을 때 사용된 목재가 바로 안면도 홍송이라한다.
안면송은 보통 15∼20m 정도. 큰 것은 30m까지 자란다. 잔 가지가 없이 곧게 뻗는 데다 나무 둘레의 위 아래 차이가 거의 없어 목재로 으뜸이다.
대신 뿌리가 깊게 직선으로 뻗지 못하는 것이 단점. 모래땅이라 뿌리가 내리기어려운 것이 원인인 듯하다. 그래서 바람이 불거나 겨울철 눈이 많이 쌓이면 힘없이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요즘도 이런 피해를 입는 안면송이 1년에 100여그루나 된다. 현재 안면도에는 80년 이상된 안면송이 434ha에 17만그루. 7평당 한 그루 꼴이다.

안면도 송림은 왕실숲이었다. 왕실의 숱한 건축사업에는 마땅히 소나무가 필요했다. 왕실에서는 안면도 송림을 조성하고 이 일대에 70여명의 산지기를 두어 지키게 했다.
임업연구원 배재수 박사는 “안면도의 경우 목재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산(封山)이 무려 73개나 됐다”고 말했다. 화재나 전쟁을 겪으면서 궁궐을 보수할 필요가 있을 경우 즉각 나무를 구하기 위해 안면도에 왕실숲을 조성한 것이다. 황월장봉산(黃月長封山)이라 해서 잡인의 출입을 막고 왕실의 관을 짜는 나무를 생산하기도 했다.
소나무는 강원도에 더 많은데 왜 조선 왕실은 안면도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바로 교통 때문이었다.
당시에 강원도에서는 강물을 이용해 서울로 나무를 보냈다. 영월 평창 정선 일대에서 나무를 베어내 뗏목을 만들면 떼꾼들이 남한강과 한강을 타고 마포나루에 나무를 부렸다. 빨라도 보름은 걸려야 서울에 도착했다.

그나마 겨울이나 봄에는 수량이 적어 제대로 운반이 이뤄지지 않았다. 홍수나 떼꾼들의 실수로 귀한 목재를 잃는 경우도 많았다. 중앙정부에서 너무 멀어 숲의 관리도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면도는 해상교통을 통해 서울까지 3일이면 갈 수 있었다. 바닷길은 더 안전하고 관리도 쉬웠다. 안면도는 처음엔 섬이 아니었다.
본래 태안반도 남쪽에 있던 태안곶. 인조 때(1638년) 전라도와 충청도 등 삼남지방에서 오는 물자를 빨리 서울로 보내기 위해 수로를 팠다.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를 파내 섬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운하사업이었다. 이후 1970년 연륙교가 놓일 때까지 약 350년 동안 섬으로 있었다.
섬은 숲을 보호하기에도 좋았다.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데다 다른 나무의 씨앗이 흘러들어올 확률도 적었다. 교잡종을 퍼뜨리지 않았고 순수 혈통을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섬 전역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나무를 훼손하면 엄한 처벌이 따랐다.

이처럼 어렵게 지켜낸 숲이지만 요즘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조선초부터 나무를 심고 가꾼 숲인데도 100년 이상 된 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일제 때 남벌을 했기 때문이다.
개인업자에게 헐값에 숲을 넘겨 아름드리 홍송이 베어져 나갔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송진 채취를 위해 일본인들이 나무마다 칼집을 냈다. 또 한국전쟁 때도 나무들이 많이 상했다. 승언리 안면송림은 울창하긴 하지만 상징이 될 만한 수백년 고목이 없어 아쉽다.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조선의 숲 안면송림. 나무 무늬에서 세월의 그림자와 역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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